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남송 전쟁 (문단 편집) === 양쯔강을 유린한 몽골군(1273~1276) === 양양이 함락된 이후 몽골군은 거침없이 송나라 남부 영토를 향해 진격했다. 이때 양자강을 건너 진군하려던 바얀의 앞에 송나라 수군이 나타나자, 바얀은 "항복하라"며 4일 동안 회유했지만, '''항복한 송나라 장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송나라 수군의 결사 항전에 바얀의 군대도 상당히 고전했으나, 작전을 바꿔 철기병을 멀리 우회해 따로 상륙시켜 후방에서 적을 동요케 하자 심리적으로 흔들린 송나라 수군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같은해 6월엔 20만 대군이 [[주장시|강주]]를 함락시켰으며 이에 남송은 13만 대군으로 맞서보려 했으나 두 번의 [[누란지세]]를 이겨낸 명장 [[맹공]]과 [[왕견]], [[여개(남송)|여개]][* 사천 지역에 산성을 구축함으로써 몽골군과의 장기 항전에 기여하였지만 참언을 믿은 조정으로 인해 사천에서 급사했다.], [[두고]]같은 장수는 더 이상 없었고 이 군세를 이끈 건 간신 [[가사도]]였다. 결국 [[정가주 전투|정가주에서 이 군대마저 괴멸되어]] 가사도가 죽은 뒤엔 남송의 운명은 정해졌고 1276년엔 수도 [[항저우|임안]]마저 함락되었다. 강릉을 지키던 고달도 외부의 지원이 없게 되자, 아릭카야의 권유에 의해 투항하고 만다. 이후 회서 지역을 지키던 [[하귀]][* 정가주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가사도에게 어가를 모시라고 하고 자신은 회서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겠다며 회서로 도주했으나, 하귀 본인은 원과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는 원에 투항하였지만, [[이정지]]와 [[강재(남송)|강재]]가 양주 지역에서 원의 군대와 분투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고, 마지막 재상들인 [[진의중]],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다.[* 진의중은 1276년에 송나라가 더이상 일어설 힘은 없다고 결론을 짓고 도망을 쳤기 때문에 사실상 문천상 혼자서 고전을 한것이다.] 이때 망명 정부파의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대놓고 가서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1278년 2월 결국 [[푸저우|복주]]까지 함락당하자 이들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고 이 와중에 문천상은 몽골군에게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 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 명 가까이 되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의 기틀은 거의 다 [[육수부]]가 전담해서 책임졌는데,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이 잔존 세력에는 옛 [[후주]]의 황실 가문이자 송 태조 조광윤에게 황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도 끝까지 참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